Here and now

 

웹서핑을 하다가 한 패션컬렉션 화보를 봤다. 모델의 얼굴과 그들이 걸치고 있는 백, 신발과 악세사리와 옷, 연출된 모든 착장이 낯설게 다가왔다. 의류학을 전공해서 학교에 다니는 동안 활동반경 주변이 패션과 연관된 것들로 꾸러져있었다. 거리를 걷다가 쇼윈도 착장을 보면 저절로 관련된 정보들이 읊퍼져 나왔다. 저건 A브랜드의 A시즌 아이템을 모티브로 한 제품이네, 저건 B브랜드에서 밀고 있는 소재와 핏인데, D모델이 업계 선두중이네. 빠르게 탁탁 세부사항과 특징들이 떠올랐던 이유는 일상에서 애쓰지 않고 접해온 환경이었기에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알고 있는 것들이었다. 그 환경으로부터 멀어진 지금은 패션계 트렌드와 지식을 익히는 일이 당연한 앎이 아닌 시간을 들여 공부해야 알 수 있는 영역으로 멀어지게 되었다.

 

 

1.

한 중견 제조업체의 퀄리티 컨트롤(QC) 직무로 파견 업무 나갔을 때의 일이다. 내가 속한 팀은 인수합병으로 딸려들어온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안정된 질서를 갖추지 못하고, 조직개편 시도중으로 분위기가 어수선하던 부서였다. 인력은 초대졸 이하의 학력으로 구성됐고, 본사의 대졸출신 연구팀을 보조 지원하는 포지션에 있는 위치였다. 딱 그정도의 업무를 맡겼다. 부서 대리 중 한명은 사출금형쪽 담당이었는데 이 대리는 쌈마이 기질이 가득한 건달스런 인물로서 그 능글맞은 친화력으로, 나쁜 소리 내뱉기 싫어하는 이사님을 대신해 트러블을 해결하는 사무실의 처세담당이기도 했다. 

 

대리는 나를 조직개편 후 밑으로 데리고 갈 수 있게끔 정직원 채용을 염두에두고 잘해주려 했다.(검증도 안됐는데 성급하게 채용하려는 점이 의아했음) 예정에 없던 교육시간이 마련되었고, 여유시간에 불러내 다른 건물에 있는 금형실로 데려가 작업과정과 주변부에 걸친 전반적인 사항을 설명해주었다. 돌아가는 길에는 샛길로 새서 담배피는 것도 기다려줘야 했다. 묘법을 전수할 제자에게 말하듯이 "내가 왜 밖에 나가서 이렇게 사람 만나고 다니는지 아냐? 시덥잖게 보이겠지만 다 이유가 있어." 만만한 인상으로 사람에게 다가가는 것이 일종의 처세 노하우 중 하나였다. 어느 날은 직원 충원 할 일이 생겨 구인공고를 냈는데 민감한 개인정보가 들어있는 구직자의 이력서를 뽑아 들고 온갖 사무실 사람에게 보여주며 다녔다. 나는 그런 모습에 실망감을 갖고 대리를 멀리했다.

 

 

2.

그래도 4년동안 쏟아 부운 돈이 있는데 전공살려 일을 해보긴 해야했다. 이번에는 동대문 디자이너 막내로 들어갔던 때 일이다. 실장겸 사장님 한 명과 회사의 중추역할을 맡은 메인디자이너 팀장님, 사입삼촌 과장님 총 3명의 구성원으로 조직된 작은 회사였다. 사장님은 타고난 장사꾼으로서 그 방면으로 뛰어난 감각이 발달한 사람이었다. 여행 직후라 여행 다녀온 이야기를 하는데 사장님의 촛점은 그런 곳에 갔으면 내다 팔 물건이 있나 봐뒀어야지 그런 것도 안 보고 뭐했냐며 수확없이 돌아온 나를 나무랐다. 팀장님은 내게 "완전 뼛속부터 장사꾼이지. 나도 그거 배우려고 밑에서 인내하고 있는거야." 사장님 성질은 불같아서 맥락없이 사자후를 지르는 일이 잦아 팀장님의 스트레스가 마를 날이 없었고, 가족이긴 하나 아랫사람인 과장님도 별 말 하지못하고 사장님 눈치보기에 바빴다. 철학서를 즐겨읽던 과장님을 보며 쓰이지 않는 지식의 무의미함을 느낀 계기이도 했다.

 

출근해보니 체계가 없고 사장님 호령하에 무작위하게 흘러가는 시스템이었다. 실무자인 팀장님과 나는 서로 장단점이 겹쳐 파트너쉽에서 상호보완이 되지 않았고, 극으로 마이너스되는 면이 컸다. 면접에서부터 팀장님은 나를 내키지 않아했는데 사장님의 개인적인 호감으로 실무자의 의견을 무시하고 밀어부쳐 나를 채용한 것이다. 팀장님 속도 모르고 가르쳐서 쓰라며. 팀장님 입장에서 골치아픈 혹덩이가 들어온 셈이었다. 작은 회사에서 홀로 업무를 핸들링해야 하는데 일일히 봐주면서 이끌어줄 여건이 아니었고, 바로 경력자가 투입돼 업무 뒷받침을 해줘야 하는 상황이었다. 알고 입사한 건 아니었지만 사장님과 팀장님의 선호가 엇갈리는 그 사이에 끼어서 민폐 진행중인 점에 죄송하고 불편했다. 상급자가 할 일은, 밑에서 부대끼고 일하는 실무자들 간에 능률이 오르도록 적재적소에 맞는 직원을 배치하는 분별이 중요한 임무라고 생각했다.

 

 

3.

어르신 친구와 대화를 나누다가 어릴 때 이사다닌 이야기가 나왔다. "왜 이사를 많이 다녔다고 생각하니?" 그 질문은 내 속으로 깊이 들어와 새로운 물음을 던졌다. 갓난쟁이 때부터 학창시절 까지 3~4년 단위로 이사를 다녔던 것 같다. 도시 주택가, 준시골, 시골, 도시 아파트 단지, 지하살이, 단칸방, 상가, 주택, 아파트 등 여러 주거형태와 동네를 넘나들었다. 어린이 신분일 때에는 출입에 경계받는 일이 없으니 친구집에 놀러다니며 여러집 가풍을 익힐 수 있었다. 전학 갈 때마다 동네 환경에 따라 갈라지는 면학분위기에 적응하는 것이 큰 과제였지만 어떻게보면 학군마다 다른 교실 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더군다나 역마살이 중증에 달한 아빠의 이동벽 덕분에 근방에 안 가본 골목없이 오만 비포장도로를 침투해 돌아다니곤 했다. 이사를 다니면서 여러 계층의 삶의 면모를 수집하며 나도모르게 그들에 대한 이해도가 자라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런 경험이 없는 친구와 대화하면서 인지하게 됐다.

 

사람들은 보통 자신이 속하고 자라온 환경을 세상의 평균점으로 여기고 그것을 기준으로 타인의 삶을 바라본다. 밝음이 내리쬐는 위 만을 바라보는데 익숙해진 시야는, 그 밑을 받치고 있는 계층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는 감수성을 자라지 못하게 가려놓는다. "빵이 없으면 고기를 주면 되지"라는 발언은 브루주아 귀족만이 할 수 대사가 아니다. 어떤 영역을 너무 모르면 그런 소리를 할 수밖에 없고 나또한 그렇게 여기는 부분이 많다. 성장과정에서 내가 당연하게 목격하고 접했던 노동자의 모습은 어떤 친구들에겐 티비에서나 등장하는 삶을 사는 자들이었고, 따라서 이해의 부족으로 위와같은 대사를 하거나 오해에서 오는 폄하발언을 내뱉기도 했다. 

 

 

인생 암흑기에 사회로부터 단절되고 내 방 몇미터가 세상의 전부로 남게되었을 때, 과거에 머물렀던 모든 지점이 나를 키우는 공부의 장이었음을 뒤늦게 깨우치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와서 드는 생각은 그 때 뭐든 좀 더 많이 봐둘걸하는 후회이다. 쌈마이라고 내치지 말고 사람 대하는 친화력을 배워둘걸, 사출팀 하는 업무 잘 봐둘걸, 돈만 보는 장사꾼이라고 나와 다른 가치를 지녔다며 멀리하지 않고 내게 부족한 돈 버는 감각을 익혀둘걸, 불만에 집중하지 않고 배울 것에 집중해볼껄.. 내 앞에 주어진 환경이 공부인 줄 모르고 무심히 지나쳐버렸다. 

 

@지금 여기에서의 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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