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 이기는 자식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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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친구(이웃 이모)에게 밥한끼 하자는 연락이 왔다. 반가운 마음이 앞서 흔쾌하게 약속에 응했다. 약속시간, 반가움의 미소가 채 사라지기도 전에 친구는 불쑥 본론을 꺼냈다. 몇 명 더 올 사람이 있다는 말에 역시나 그럼 그렇지라는 체념. 그 사람들은 궁금할 것도 없이 종교 전도에 뜻을 함께하는 회원님들이었다. 연락한 이유가 근황 공유도 맞는데 그건 겸사겸사에서 였고, 곧 치룰 종교 행사에 참석시키려는데 더 큰 목적이 있었다. 내가 생각한 인간관계는 꼭 이런 식으로 상대가 특정한 목적을 보이면서 끝을 맺게 된다. 근래 이런 일이 몇 번 있었다. 점점 순수한 교류에 대한 기대감이 상실되고 있다. 


근황을 나누는 사이 곧이어 다른 회원 한 명이 도착했다. 구면인 회원님은 친근한 인상이 아니었던 게 공격적인 기운이 불편한 이미지로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특유의 쇼맨십, 발산하는 아우라가 기독교인 같아서 이질감이 감돌았는데 기독교에서 개종해왔다고 밝혔다. 그 회원님이 오자 현재 작업중인 회원 진도 여부를 물으며 대화의 물꼬가 트였다. 그러다가 일상주제로 돌아오면서 주요 화제가 가족 이야기로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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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는 얼마전에 손주를 봤다고 한다. 비슷한 나잇대의 회원님도 앳저녓에 할머니 명찰을 단 것 같다. 초보 시어머니가 된 이모가 이런저런 아들내외 이야기를 꺼내자 회원님은 시어머니 된 선배로서 본인 경험을 곁들이며 며느리 대하는 처세법을 강의해줬다. 웨딩홀에서 일할 때 아들가진 부모, 딸 가진 부모 입장 다르다는 걸 익히 봐와 알고있었지만 이렇게 가까이에서 농도 진한 인물을 접할 줄은 몰라서 조금 색달랐다. 


회원님이 들려준 썰은 객관적으로 누가보기에도 다른 의도없이 시댁에 예쁘게 보일려고 노력하는 며느리의 행동이었는데 그 애씀을 여시같은 기집애의 술수로 싸잡아 비꼬았다. 이미 뭘해도 며느리는 아니꼬운 여시 이미지로 굳혀진 듯 보였다. 회원님은 초반에 며느리 기를 잘 눌러놔야 집안이 평화롭다는 주장을 펼치며 내게로 시선을 옮겨 시어머니가 트집잡을 땐 괜한 어르신 고집에 꼬장부리는거니 네네하며 숙이고 들어가는 게 지혜로운 며느리의 자세임을 일러주었다. 며느리 비난은 계속됐다. 경제활동하는 아들의 노고만 희생이고, 아이낳아 키우는 경단녀 며느리의 희생은 그깟 허드렛일로 취급했다. 순진하고 착한 아들은 한없이 짠하고 불쌍한 존재였고, 아들 갉아 호강하는 며느리는 질투나 미워죽겠는 고것이었다. 회원님 얼굴을 보는데 그 표정은 야트막한 질투의 감정이 아닌 뿌리깊은 어딘가에서 비롯된 해묵은 분노의 표출같았다. 


아이러니한 건 회원님에겐 결혼한 딸이 있는데 시집가서 고생하는 딸을 보면 마음이 그렇게 아파서 떨어져있지만 애지중지 신경써서 돌봐주게 된다고 했다. 내앞에 터놓고 말하기를 딸이랑 며느리는 이게 어쩔 수 없이 다른거라며.. 이모도 그 뜻을 이해한다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앞에 있는 내가 남자였으면 이렇게 내놓고 구질거리는 말들을 늘어뜨려놓았을까. 너도 딸이니까 당연하게 공감할 것이라는 암묵적 연대에 강제로 포함시키는 분위기가 불편했다. 그 날은 평일 초저녁 시간대라서 식당에 아주머니 손님들이 많았는데 무슨 날인지 거기서도 며느리 욕이 한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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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딸 입장에서 공감가는 이야기가 있었다. 입을 모아 아들에게는 못할 말을 며느리나 딸에게는 하게 된다는 말이다. 감정의 쓰레기통, 그 말이 뭔지 알 것 같아서 순간 가슴이 시큰거렸다. 깔끔하게 정리된 최종 보고안은 아들에게, 최종 보고 올리기 전까지 자잘하고 성가신 일처리 과정은 딸과 나누는 식이라면 이해할까. 회원님들은 아프거나 고민거리가 있어도 딸, 며느리에게나 언질하지 아들은 대하기 어렵기도 하고 걱정할까봐 말을 않게 된다고 했다. 마땅히 이해가는 것이 내 앞에서는 감정적 속내를 쏟아내는 엄마가 오빠에게는 그런 말을 늘어놓기 어려워하고 잘 내색하지 않는 온도차가 있다. 엄마만 그러한가 아빠도 아들자식은 어려워해서 내게는 편한 언어인 사투리를 쓴다면 아들에겐 정돈된 표준어를 쓰려는 식의 태도차를 보인다. 재밌는 건 어느 순간 스스로 감정받이 포지션을 인지하고 그런 에너지를 받아주지 않자 상대가 행위를 (어느정도) 멈췄다는 점이다. 하여간 이모조차도 며느리가 생기니 아들보다 며느리에게 전화를 걸어 아쉬운 소리를 하게 된다고 말을 이었다. 


회원님의 가족 얘기를 들었다. 친어머니가 그렇게 본인을 인정 해주지 않으셨다고 했다. 평생을 헌신하고 돌본건 나인 딸인데 당신께선 몸져누워서도 오매불망 남동생만 위함에 맺힌 것이 많아보였다. 엄마께 선물을 드려도 남동생에게 필요할 것 같다며 그걸 다시 남동생에게 준다나. 이모도 형제가 많은데 어릴 적 음식을 먹을 때, 앞에서는 음식을 공평한 갯수로 나눠줘도 뒤에가서는 아들에게 몇 개 더 몰래 얹어주었다곤 했다. 이에 회원님은 현명하신 엄마라고 맞장구를 쳤다. 그 시절 많은 딸들의 설움이 그려졌다. 회원님은 60여년 간 여기(명치쪽을 쓸며)에 콱 막혀있던 무언가의 실체를 알지못해 답답했는데 이제사 좀 알겠다는 말을 했다.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은 마음, 충족되지 않은 애정결핍과 향할데없는 서운함의 감정 일부가 쌓이고 뭉쳐 아들에 대한 집착과 며느리를 향한 질투의 감정으로 표출된 것 같았다. 자신의 그림자로 상대를 꼬아보는 시선은 내게도 있는 모습이었기에 반면교사가 되어 다가왔다. 


회원님은 그런 성장과정이 한이었는지 차별하며 자식을 키웠다고 하지는 않았다. 물질적인 지원을 말한 듯 한데 여담 속 스쳐지나가는 회원님 아들의 대사는(같은 자식입장에서) 분명 정서적 욕구에서 비롯한 투정의 목소리에 가까워보였다. 옷이나 물건은 부족하지 않게 케어해줬지만 중요한 일부를 놓친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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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먹었으니 이제 헤어지나 싶었는데 더 만날 사람이 있다며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새로운 회원님의 추가, 만나자마자 또 인삿말처럼 포섭중인 회원에 대한 상황 보고를 나눴다. 포섭당하는 입장의 회원님도 나와 마찬가지로 처음 몇 번은 싫어도 예의상 애둘러 거절의 뜻을 밝힌 것 같았는데 굴하지 않고 작업한 결과 더 이상 연락하지 말라며 고소하겠다는 강경한 태도를 보였나보다. 그걸보고 별 거 아니라는 듯 우스게 소리로 넘기는 걸 보고 속이 답답해서 체할 것 같았다. 웃으며 가하는 벽창호 폭력. 어려서부터 종교의 온갖 모순 보고자란 것을 생각하면 그 믿음이란 것이 지긋지긋하다.


두번째 회원님(이하 회원님2)은 스무살 쯤 결혼해 벌써 장성한 딸이 있는 젊은엄마였다. 회원님은 물어보지도 않은 자기 소개를 주섬주섬 늘어놓으며 말미를 지친 표정으로 끝맺었다. 그리고는 부담스런 시선으로 나를 훑으며 칭찬했다. 칭찬이 기분 좋지 않았던 이유는 나를 멋대로 왜곡해서 입맛대로 소비하는 눈빛이 느껴져서이다. 본인이 미처 누려보지 못한 미혼여성의 청춘, 가정에 얽매이지 않은 삶의 미련을 내 모습에 투영해 축축한 시선을 보내오는 게 거북했다. 다시 이야기 화제가 엄마에 대한 이야기로 흘렀다. 이 무리의 또 한가지 공통점은 모두 엄마와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경험해본 딸이란 것이다. 회원님2의 이른 결혼은 불우한 가족관계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도피성 결혼이었고, 그런 결혼이 행복한 삶으로 이어질 확률은 예상가능하다시피 좋지만은 않았을 터였다. 


회원님1은 엄마와 문제 있는 딸들이 일찍 결혼하는 경향이 많다며 갑자기 방향을 틀어 아직까지 집에 붙어사는 나를 보고 너는 이런 우리의 응어리를 모를것이란 이상한 오해를 하며 선을 그었다. 불행겨루기라도 하려는 건지 회원님1은 첫 만남부터 넘겨짚기를 잘했고, 난데없이 공격당해 불쾌감을 느꼈다. 모난 기운을 가진 사람과 접촉하고 오면 마음이 축축 처져서 피곤하다. 유독 접촉 후에 기분을 불쾌하게 만드는 만남이 있는데, '만남 후의 기분'이 교류지속성을 판단하는데 좋은 길잡이가 되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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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보면 끝내 부모 이기는 자식은 없는 것 같다. 나와 부모님 사이를 떠올려봐도 우리가 보이지 않는 유기체적 고리망으로 무언가 깊게 묶여있음을 인지한다. 부모님의 다툼을 볼 때 마음이 짓이겨지듯 쓰린 슬픔, 평화로운 부모님 사이를 볼 때 자식이 느끼는 평안과 안온함, 부모님을 미워하는 마음을 가질 때 모든 일이 광역적으로 풀리지않는 혹은 그 반대가 되는 기묘한 현상. 부모님의 관계는 공간을 지배하는 기후로써 이 기후를 벗어나면 당연 내가 받는 영향력 또한 적어지지만, 물리적 거리를 뛰어넘는 이 묘한 연결감의 작용이 대체 무슨 시스템의 작동인건지 부모님의 상태에 따라 내 삶의 안녕이 큰 부분 맞닿아있다는 걸 체감하게 됐다.   


어느날 산책하며 나눈 대화인데 어머니와 깊은 트러블을 겪었던 이모가 "부모님께 잘해야 내 일도 잘 되는 그런 게 있어.." 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흘렸다. 가슴으로 곧장 꽂혀들어온 이 말의 핵심은 부모님(사람) 원망하는 마음은 순리에 어긋나는 법칙이라는 메세지를 내포한 의미였다. 큰 어려움을 경험한 사람과 대화해보면 한구석에 해탈한 보살같은 면모를 보이는 순간이 있다. 그런 말을 전할 수 있기까지 이모가 감내하고 겪었을 마음의 고통과 감정의 부침을 헤아려보면 그 말이 가진 깊이와 성찰을 가늠해볼 수 있다. 이모와는 허물없는 대화를 할 수 있는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불편한 의무감을 만드는 종교 전도가 만남을 이어갈 수 없게 만드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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